1. 역사의 장막 뒤에 가려진 고구려의 후예, 발해
우리는 한국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신라, 고려, 조선을 중심으로 배우지만, 그 역사의 한켠에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왕국으로 남아있던 또 다른 강대국이 있었습니다. 바로 찬란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약 230년간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발해입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통합하여 건국되었으며, 한때는 요동을 넘어 드넓은 만주 벌판과 연해주까지 그 위엄을 떨쳤던 해동성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이후의 역사서에서는 발해의 존재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고, 남쪽에 있었던 신라와의 관계나 기록의 부재 등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그 중요성이 종종 간과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의 정치, 군사,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며 북방의 강자로 우뚝 섰던, 분명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입니다. 이제부터 ‘잃어버린 고구려의 혼’이라 불리는 발해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그 위대한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2. 발해의 건국, 고구려 계승의 염원이 담긴 첫걸음
(1) 혼란 속 피어난 건국 염원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지만, 고구려인들의 독립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중국 내륙 곳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重像)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은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에 이주하게 됩니다 . 이곳은 당나라가 동북방 이민족들을 통제하던 주요 거점이었으나, 당의 가혹한 지배와 혼란스러운 내부 정세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독립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696년, 영주에서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의 폭정에 항거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북아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5]. 이 틈을 타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걸사비우(乞四比羽)는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독립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당나라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각각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내렸으나, 이들은 이를 거절하며 당의 지배에 들어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2) 천문령 전투와 발해 건국
당은 우록금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려 했습니다. 이해고와의 교전 중에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그의 무리와 고구려 유민을 통솔하게 된 인물이 바로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었습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험준한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당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이해고만이 겨우 탈출할 정도였다고 기록될 만큼 당군은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천문령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발해가 자주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승리 이후 대조영은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동모산(東牟山)에 도읍을 정하고, 698년에 건국을 선포합니다. 초기 국호는 ‘진(震)’ 또는 ‘진국(振國)’이었으나,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받은 것을 계기로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유민들의 강한 독립 의지와 대조영의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이를 뒷받침했던 말갈족의 협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역사적 성과였습니다.
3.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위용: 영토 확장과 활발한 대외 교류
(1) 광활한 영토와 5경 제도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빠르게 성장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만주 지역과 연해주 일부를 아우르며, 동쪽으로는 동해에,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했으며,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유역까지 세력을 뻗쳤습니다. 9세기 선왕(宣王) 대에 이르러서는 “해동성국” (海東盛國,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당나라에서 발해의 강력한 국력과 번영을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발해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5경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읍을 여러 차례 옮기며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중 상경 용천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의 장안성(長安城) 다음가는 대도시로 손꼽힐 만큼 번성했던 국제도시였습니다.
(2) 균형 있는 외교와 국제적 위상
발해는 주변국들과 활발한 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당나라와는 건국 초에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문물을 교류하며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발해의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유학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해의 통치 제도와 문화에 접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본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십 차례에 걸쳐 사신을 교환했습니다.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자신들을 ‘고구려국왕 대광(高句麗國王 大光)’ 등으로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일본 역시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별칭)의 옛 영토를 회복한 나라’로 인정하며 환대했습니다. 이는 당시 발해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독립적인 주체이자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확실히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한편 남쪽의 신라와는 견제와 대립 관계가 강했지만, 때로는 무역로를 통해 간접적인 교류도 이루어졌습니다. 발해는 이처럼 다자 외교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습니다.
4. 고구려의 숨결이 깃든 문화와 민족 구성: 다채로운 천년 왕국
(1) 고구려 문화의 계승과 발해만의 독창성
발해는 건국 주체인 고구려 유민들의 주도로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지붕의 치미(鴟尾), 온돌 시설, 고분 양식(예: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 등은 고구려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발해의 불상과 탑 역시 고구려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섬세하고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은 고구려 불상의 특징과 발해만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조화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해는 또한 당나라의 율령 제도와 교육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립 교육기관인 주자감(朱子監)을 설치하는 등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발해의 실정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결과였습니다. 발해의 문무왕 때에는 ‘발해 문자를 만들었으나 후에 망하면서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하여, 독자적인 문자 창조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시사합니다.
(2)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공존, 그리고 그 의의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지배층은 주로 고구려 유민들이었고, 피지배층이자 다수를 차지했던 것은 말갈족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인들의 선진 문물과 통치 기술을 바탕으로 말갈족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말갈족 중 일부는 중앙 관직에도 등용될 정도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말갈족 중에서도 발해에 복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던 부족도 있었지만, 대체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발해라는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나갔습니다. 이러한 다민족적 구성은 발해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가져왔으며, 오늘날 우리가 역사 속 다문화 사회의 한 예시로 발해를 재조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발해는 이러한 다양성을 통합하여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발해의 멸망과 그 이후: ‘잃어버린’ 역사로서의 발해의 재조명
발해는 약 23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지만, 10세기 초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급작스러운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926년, 발해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이 거란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결국 요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항복하며 왕국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외에도 내부적인 지배층의 분열, 소수 지배층인 고구려인과 다수 피지배층인 말갈인 간의 갈등, 그리고 자연재해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해 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정하고 극진히 대우하며 왕실의 성씨인 왕씨를 하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포용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단순히 신라의 뒤를 이은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정통성까지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이후의 역사서, 특히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는 한반도 중심의 역사 인식을 강조하면서 발해를 변방의 역사, 혹은 거란족의 역사로 축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린’ 왕국처럼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대 강대국으로서,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적인 왕국이었음이 명백히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6. 잃어버린 것이 아닌, 우리가 찾아야 할 고구려의 혼
발해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잃어버린 고구려의 혼’이라는 표현처럼,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그 정신과 문화를 계승하여 북방에서 민족의 기상을 이어갔던 위대한 왕국이었습니다. 대조영의 건국부터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치기까지, 발해는 당나라, 일본, 신라 등 주변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습니다.
광활한 영토를 경영하고, 고구려의 문화 유산을 발전시키며, 다양한 민족을 포용한 발해의 역사는 우리에게 강력한 자긍심을 안겨줍니다. 또한, 발해 역사의 재조명은 동북아시아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 시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억하며 되살려야 할 ‘고구려의 혼’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