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잊혀진’ 강대국 백제의 화려한 부활
한반도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신라의 삼국통일에 초점을 맞춰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한’ 역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백제는 찬란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기 왜곡된 기록이나 사비성 함락의 비극적 이미지 탓에 그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단순한 한반도 서남부의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간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 그리고 일본 열도에까지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문화와 문물을 전파했던 명실상부한 ‘문화 강국’이자 ‘해상 강국’이었습니다.
오늘날 백제의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하고 그 위대한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깊이 이해하고 자긍심을 높이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이제부터 백제가 어떻게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성장했으며, 어떤 면모로 ‘해동성국’이라 불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찬란했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백제는 결코 ‘패배자’가 아닌, 당대 동아시아를 주도했던 위대한 주역이었습니다.
2. 한성 백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고대 강국
백제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부여계 유이민 집단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건국된 나라입니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한 이래, 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서해안을 통한 편리한 해상 교통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생산력이 높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에 가장 유리한 통로였습니다.
(1) 지리적 이점과 초기 발전
백제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초기부터 강력한 국력을 길렀습니다. 특히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이르러 백제는 최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근초고왕은 마한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여 전라남도 해안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북으로는 황해도, 남으로는 남해안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 시기에 백제는 중국의 동진(東晉)과 수교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활발한 교역 활동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이는 백제가 한반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2)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 해상 강국의 면모
백제는 특히 서해를 통해 중국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였으며, 백제는 남조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이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백제의 문화적,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백제의 사신과 상인들이 오고 가며 형성된 ‘바닷길’은 백제를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해상 교통의 지배력은 백제가 단순한 농경 국가가 아닌, ‘해상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음을 입증합니다.
3. 웅진/사비 백제: 문화적 성숙과 국제 교류의 정점
5세기 말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熊津, 현 공주)으로 천도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백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심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해동성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성왕(聖王) 대에 이르러 사비(泗沘, 현 부여)로 다시 천도하고 ‘남부여’로 국호를 일시적으로 변경하는 등 국가 재건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1) 찬란한 백제 문화의 정수: 예술과 불교의 만개
웅진과 사비 시기의 백제는 세련되고 섬세한 예술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금제 장신구, 진묘수(鎭墓獸) 등은 백제 특유의 미감과 뛰어난 세공 기술을 보여줍니다. 특히 사비 시대의 백제는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절제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부여 능산리사지 등은 백제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과 예술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도교와 불교 사상이 융합된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으며, 당시 백제의 종교적, 예술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웅변합니다.
(2) ‘문화 수출국’ 백제: 일본 아스카 문화의 기원
백제는 단순히 중국 문화를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백제만의 독특한 색채로 재해석하여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고대 일본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고, 불교 경전, 불상, 사원 건축 기술자, 승려, 의사, 역법 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과 기술을 보냈습니다. 백제 출신 학자 왕인(王仁)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일화는 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과 지식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백제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고대 아스카(飛鳥) 문화가 꽃피웠으며, 백제의 사찰 건축 양식과 불상 조각 기술은 일본의 사찰과 불상 제작에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적인 영향력은 한반도 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상 무역로를 통해 주변국에 파급되는 ‘문화 수출국’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백제를 ‘숨겨진 문화 강국’으로 재평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4. 백제의 대외 교류와 해상 네트워크: 동아시아를 잇는 중심축
백제는 단순히 중국 남조나 일본과의 교류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서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축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백제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했던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1) 중국 남조-백제-왜를 잇는 ‘삼각 교류’
백제는 중국의 남조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로부터 들여온 선진 문물을 다시 왜(倭, 일본)에 전파하는 중계무역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백제의 사신과 상인들은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의 비단, 도자기, 철기 등을 들여왔고, 이를 왜에 판매하는 동시에 백제의 독자적인 문물과 기술을 수출했습니다. 이 삼각 교류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백제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특히 백제는 한반도에 위치하면서도 대륙 문물을 해상을 통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내부적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이를 섬나라인 일본에 전파하는 독특한 위치를 점했습니다. 이는 백제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주변국들과의 상호 협력 속에서 자신의 국익을 최대화하려 했던 치밀한 ‘전략적 의사결정’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2) 백제인들의 탁월한 항해 기술과 개척 정신
이러한 활발한 해상 교류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항해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백제인들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멀리 떨어진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리적 제약을 극복하는 탁월한 항해술과 개척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해안 지역에 정비된 항구 시설과 선박 건조 기술 역시 백제가 해상 강국으로서 위용을 떨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상 역량은 백제가 군사적으로도 해양을 통제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삼국통일의 주요 배경 중 하나였던 나당연합군의 해상 침략에도 백제가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5. ‘잊힌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문화 원류’로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반도 서남부를 지배하며 고구려와 신라 못지않은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한성 시대의 역동적인 발전, 웅진과 사비 시대를 통한 문화적 성숙,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해상 네트워크 구축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세계적인 역량을 지닌 문화 강국이자 해상 강국이었습니다.
물론,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남긴 풍부한 문화유산과 국제적인 교류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금동대향로의 섬세한 아름다움, 일본 아스카 문화에 뿌리내린 백제의 숨결, 그리고 바닷길을 개척했던 백제인들의 개척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백제를 단순한 ‘잊힌 역사’가 아닌 ‘자랑스러운 문화 원류’로 재평가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