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군주 중 ‘폭군’이라는 오명을 쓴 이는 연산군과 함께 광해군이 대표적입니다.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했다는 비극적인 기록은 그를 잔인한 군주로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최근 역사 재평가의 흐름 속에서 광해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과연 광해군은 정말 폭군이었을까요? 그의 폐위 뒤에 숨겨진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심층적으로 탐색해 보겠습니다.

1. 광해군, 과연 폭군이었을까? 재조명되는 그의 업적들
광해군은 우리가 흔히 아는 ‘폭군’의 이미지 뒤에,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고 실리 외교를 펼치려 했던 현실적인 군주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힘쓴 광해군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에 힘썼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 민생 안정을 위한 대동법 시행
전후 복구 사업 중 가장 큰 업적은 단연 대동법 시행입니다. 백성들에게 곡물을 공물 대신 쌀로 바치게 함으로써 가렴주구를 막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습니다. 이 대동법은 후대에도 이어져 조선 재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2) 궁궐 재건을 통한 나라의 위엄 회복
(2) 뛰어난 외교적 통찰력으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
광해군은 명나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는 당시 명분론에 입각한 지배층의 반발을 샀지만, 전쟁의 참화를 겪은 백성들을 다시 전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한 고심 어린 선택이었습니다.
1) 명후금 사이에서의 실리 외교
명나라의 원군 요청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강홍립을 파견하며 실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인 외교 정책이었습니다.
(3) 문화적 치적 및 편찬 사업에 힘쓴 광해군
광해군은 의료 기술의 발전을 위한 의학 서적 편찬에도 힘썼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후원하여 백성들의 건강 증진에 기여했습니다.

2. 광해군을 폭군으로 낙인찍은 결정적 사건들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폭군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폐모살제(廢母殺弟)’에 있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 가장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1) 형제와 어머니를 폐한 광해군의 비극적인 선택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1) 영창대군 살해와 왕권 불안정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 아들인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살해했습니다. 이는 그의 폭군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 인목대비 폐위와 유교적 명분의 상실
인목대비 폐위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상상할 수 없는 패륜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왕실의 어른을 폐한다는 것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고 유교적 명분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2) 북인 세력의 독점과 다른 세력 숙청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했던 북인 세력을 등용하고 다른 정치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獄事)들은 광해군 정권의 독선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1)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영창대군을 둘러싼 ‘계축옥사’와 권신들의 서자 7명이 연루된 ‘칠서의 옥’은 광해군 정권이 정적들을 숙청하고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광해군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초래했습니다.
(3) 성균관 유생들의 반대 상소와 민심 이반
폐모살제는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백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교적 윤리를 생명처럼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광해군 폐위,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폐위됩니다. 인조반정 세력은 ‘폐모살제’를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복합적인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1) 폐모살제의 명분과 서인 세력의 반정
인조반정 세력, 즉 서인들은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천륜을 저버린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광해군 폐위의 핵심적인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1) 명분 뒤에 숨겨진 실리적 이유
하지만 인조반정의 진짜 이유 중 하나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당시 서인 세력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배척해야 한다는 명분론적 입장이 강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의 강력한 왕권에 대한 견제와 북인 세력의 독점적 권력에 대한 불만도 폐위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2) 서인 세력의 권력 장악 의도
인조반정은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획득하려는 서인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한 사건이었습니다. 광해군 폐위 이후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4. 광해군, 폭군과 성군의 경계에서: 역사의 복합적인 시선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오명과 뛰어난 중립 외교, 전후 복구 업적을 동시에 가진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유교적 명분보다는 백성의 삶을 우선시하는 실리적 선택을 했으나, 그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윤리를 어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 집권 세력의 정치적 시선과 이후 역사 서술자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져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해군을 단순히 폭군 또는 성군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어떤 군주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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